[스케일업 X SBA(서울산업진흥원)]
이름난 회계법인에서 식음료 부문 전략 컨설턴트로 일하던 민명준 씨는 문득 생각했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 더 큰 가치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우선 오래 맡았던 식음료 부문에서 주제를 찾았다. 원래 음식에 관심이 많았고 마침 동생도 요리사로 일하고 있어서 사업 주제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접한 부문이 푸드 업사이클링이다. 식품을 만들고 남은 원재료, 부산물을 다시 가공해 새로운 상품으로 만드는 기술이다.
푸드 업사이클링 맥주 부산물을 수거하는 민명준 대표
1년에 국민 1인당 572kg의 식품 부산물이 만들어진다. 전부 모으면 연간 2958 만t에 달한다. 70% 이상이 쓰레기로 분류되므로 처리와 매립 비용이 많이 들고, 환경 오염과 탄소 배출도 일으킨다. 푸드 업사이클링은 식품 부산물의 처리와 매립 비용, 탄소 배출량을 줄인다. 음식 부족을 해결하고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드는 기술로 각광 받는다. 시장 규모도 크다. 2019년 기준 푸드 업사이클링 부문의 세계 시장 규모는 48조 원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민 씨는 회계법인을 박차고 나와 먼저 식품 브랜드를 만들어 운영했다. 기업 운영 경력을 쌓고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다. 이를 토대로 푸드 업사이클링 스타트업 리하베스트(RE:harvest)를 창업했다.
민 대표는 푸드 업사이클링 소재 가운데 맥주와 식혜 부산물을 주목했다. 영양 특성, 규제 환경을 꼼꼼히 살펴보니 맥주와 식혜 부산물의 성장 잠재력이 가장 컸다. 연구 끝에 이를 활용한 대체원료 ‘리너지 가루’를 만들었다. 리너지 가루는 밀가루와 성질이 거의 같다. 하지만 칼로리는 30% 낮고 단백질은 2배, 식이섬유는 21배 풍부하다. 생산 단가도 30% 싸다.
문제는 사업 자금과 파트너 기업 확보였다. 주제와 아이템을 확보했지만, 이를 사업으로 이끌 요소들이 부족했다. 답답하던 그는 서울창업허브(SBA)에 도움을 청했다.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지는 맥주 부산물
요즘 기업들에게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경영의 기본 모델처럼 여겨진다. 오비맥주도 환경과 사회에 기여하면서 맥주 사업의 성장을 모색하는 험난한 여정에 놓여있다. 혁신도 혁신이지만, 친환경이면서도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룰 새 사업도 찾아야 했다. 그러다 생각이 다다른 곳이, 한국에서만 연간 41만t(2019년 기준) 이상 만들어지는 맥주 부산물(맥주를 만들기 위해 곡물에서 당과 전분을 빼내고 남은 맥주박, 효모 등)의 활용 방안이다.
맥주 부산물을 수거하는 모습
맥주 부산물의 45%는 퇴비나 사료로 쓰이지만 나머지는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진다. 쓰레기 처리 환경부담금만 연간 280억 원에 이른다. 이 때 110만t, 승용차 24만대가 내뿜는 만큼의 탄소도 나온다.
맥주 부산물을 가공하면 식재료로 쓸 수 있다. 칼로리는 적고, 단백질과 식이섬유 등 영양소는 풍부하다. 맥주를 만드는 한 부산물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이를 효율적으로 재가공하면 음식 원재료 낭비를 줄이고 환경부담금을 아낄 수 있다. 모범 ESG 경영 사례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좀처럼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오비맥주는 모기업 AB인베브의 오픈이노베이션(기업이 내부 자원을 공개, 외부 기업과 함께 기술이나 상품을 만들며 혁신을 시도하는 것)사례 ‘100+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참고했다. 지속경영, 친환경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진 스타트업을 발굴해 100년 가는 기업이 되도록 돕는 지원 프로그램이다.
오비맥주와 SBA의 스타트업 밋업 현장
오픈이노베이션을 시도할 믿음직한, 능력 있는 스타트업을 찾는데 가장 적합한 수단은 ‘밋업’, 기업과 기업의 만남의 장이었다. 오비맥주의 발길은 자연스레 SBA로 향했다. 수많은 밋업 추진 경험과 성공 사례를 가진 곳으로 판단해서다.
'대기업과 스타트업 동반 성장 모델, 결코 꿈 아냐'
최수진 SBA 파트장은 과거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들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했다. 스타트업 발굴과 밋업까지는 잘 됐지만, 그 이후 관리·지원이 부실한 경우가 많았다. 홍보와 자금이 모자라, 기술과 인력 보호가 제대로 되지 않아 유망한 스타트업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사례가 많았다.
최 파트장이 생각한 것은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실질적 협력 모델, 한쪽만 성장하는 것이 아닌 동반 성장하는 모델이다. 젓가락 한 쌍으로 음식을 집는 것 처럼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한 몸처럼 협력하고 함께 성과를 만드는 모델이다. 스타트업이 아이디어와 실행력으로 사업을 만들면, 시설과 자금이 풍부한 대기업이 이를 이끈다. 사업 성공 확률은 자연스레 높아진다.
이 모델을 만들기 위해, 먼저 스타트업의 고충에 귀를 기울였다.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금, 특히 초기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자금이었다. 스타트업이 대기업과 사업을 논의한 후 정작 상품을 만들 자금이 없어 협업이 무산되는 사례가 잦았다.
그러니 대기업은 스타트업 투자를 망설인다. 간혹 기술만 제공하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에 대기업에게는 확신을 줘야 했다. 열정뿐만 아니라 능력과 기술이 검증된 스타트업을 소개해줘야 했다. 한편으로는 대기업이 스타트업과의 상생 의지를 가졌는지, 파트너로 인정하고 함께 성장할 각오가 있는지도 살펴봐야 했다.
최 파트장은 SBA가 대기업과 스타트업 사이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결론은 SBA가 대기업과 먼저 논의하고, 주제와 조건 등을 파악한 후 오픈이노베이션에 알맞은 스타트업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 스타트업을 키우기 위해 초기 운영 자금과 업무 공간, 언론과 투자사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도 SBA의 몫이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동반 성장 모델 구상을 마쳤다. 실행하고 검증할 차례였다. 그때 SBA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명준 리하베스트 대표와 오비맥주였다.
SBA와 대기업-스타트업 동반 성장 사례 1호
아이디어와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 함께 성장할 오픈이노베이션 파트너를 찾는 대기업, 이들 사이를 견고하게 연결하고 후방에서 아낌없이 지원하는 기관이 만났다. 대기업과 스타트업 동반 성장 모델 1기 성공 사례가 탄생한 순간이다.
리하베스트와 오비맥주의 합작품, 맥주 부산물로 만든 업사이클링 에너지바 ‘리너지 바’는 크라우드펀딩 목표액을 6300% 초과달성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후속 제품 리너지 그래놀라의 반응도 좋다.
오비맥주와 리하베스트 협약식
원래 맥주 부산물은 식품 재료로 쓸 수 없었지만 오비맥주와 리하베스트가 함께 문을 두드린 끝에 최근 이 규제가 완화됐다. 민 대표는 가치관이 같은 오비맥주가 파트너라는 점이 정말 다행이라고 말한다. 오비맥주 담당자와 이야기하며 ‘ESG 유행 전부터 친환경 경영을 생각했다’는 느낌을 받은 점, 리하베스트를 투자 대상이 아닌 파트너로 보고 일한다는 점이 인상깊다고 했다.
오비맥주 CV 담당자는 민 대표의 발표를 듣는 순간 ‘무조건 이 스타트업과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한다. 심사 당시 리하베스트가 가려운 곳을 긁어줬다고, ‘10을 생각했는데 그 이상을 보여줬다’고 했다. 혁신과 함께 친환경, 지속가능한 성장 솔루션을 원하던 오비맥주는 리하베스트를 만나 모범 ESG 사례를 만들었다.
맥주박 시설을 둘러보는 민명준 대표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협업은 간혹 파국으로 치닫기도 한다. 자금이 많고 규모가 큰 대기업이 스타트업의 기술과 인재, 특허를 빼앗는 사례가 적지 않다. 오비맥주는 애초에 지분 투자나 인수를 고려하지 않고 스타트업과의 협업과 오픈이노베이션을 바라봤다고 강조한다. 구매팀 안에 신사업부서로 지속경영팀을 만들고, 더 많은 스타트업과 더 많은 ESG 사례를 만들기 위해 밋업 스타트업을 매년 열겠다고도 밝혔다.
리하베스트와 오비맥주, SBA의 밀월은 2019년 밋업 후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끈끈하다.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상품, 시너지를 궁리한다.
리하베스트의 푸드 업사이클링 제품군
먼저 재료와 상품 종류를 늘린다. 지금은 맥주와 식혜 부산물로 리너지 가루를 만들지만, 곧 소주와 막걸리, 착즙주스 부산물로 리너지 가루를 만들 예정이다. 이들 역시 원재료의 영양을 고스란히 담은, 기존 밀가루를 대체할 푸드 업사이클링 재료로 각광 받는다. 리너지바 외에 피자 도우, 파스타 면과 과자 등 리너지 가루를 원료로 한 상품군도 마련했다. 분말형태 대용식, 어묵이나 각종 소스 재료로도 리너지 가루는 유용하다.
리하베스트는 세계 맥주 시장 점유율 30%를 가진 오비맥주와 손 잡고 세계 시장에 진출한다. 우선 공략할 곳은 아시아, 동남아시아 국가다. AB인베브와 수출입 전문 회사의 도움 덕분에 상당 부분 진척됐다. 중국으로의 사업모델 확장도 조율 중이다. 북미, 유럽 시장도 놓칠 수 없다. 푸드업사이클 협회와 함께 미국과 유럽 시장 진출을 노린다.
오비맥주와 파트너십을 맺은 민명준 리하베스트 대표
리하베스트는 아이디어를 앞세워 2023년 200억 원의 매출을 기대한다. 12만 t의 식품 부산물을 재가공해 음식 낭비를 줄인, 31만t의 탄소 배출량을 없애 환경을 보호하는 건전한 매출이다. 나아가 1조7000억 원 규모의 제분 시장, 55조4000억 원 규모의 세계 기능성 제분 시장을 겨냥한다.
민 대표는 “리너지 가루 1kg은 물 3.7t과 식품 부산물 3kg, 탄소 11kg만큼을 절감한다. 선한 소비뿐 아니라 고단백질, 식이섬유 등 영양소도 풍부하고 밀이나 쌀가루를 대체할 만큼 쓰임새도 많다. 오비맥주, SBA 등 파트너와 환경에 기여하고 식품 자원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기업으로 성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글 / IT 동아 차주경(racingca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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